마리끌레르 2009년도 6월호 156페이지
막내로 살아남기
여자들이 싫어하는 군대 이야기 하나. 군대에서 나는 소위 ‘꼬인 군번’으로 살아야 했다. 입대한 지 2~3개월, 늦어도 6개월이 지나면 보통 후임을 받고 막내로서의 소임을 인수인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지지리도 복 없는 팔자는 15개월이 지나도록 후임을 받지도 못하고 온갖 잡무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남들보다 조금 늦게 입대한 덕에 내가 모실 고참은 모두 주민등록상 동생님들. 어쨌거나 군대에서의 그 참혹한 경험 덕에 막내 생활에는 인이 박혀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나보다 먼저 사회에 진출한 친구들의 막내 생활을 들을 때면 코웃음을 치기 일쑤였다. 뭐 설마 군대보다 심하겠어? 하지만 이런 자신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막내 생활 대부분이 그렇듯 온갖 잡무는 이 신입사원의 몫이었다. 다만 예상에서 빗나간 부분은 업무 특성상 여자 선배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 각자 개성은 다양하지만 연약하다는 공통분모를 가진 여자 선배들을 대신해 조금이라도 몸 쓰는 일은 모두 이 듬직한 남자 막내의 소임이었다. 커다란 이벤트용 선물을 나르는 것도, 자잘한 물품 정리도, 심지어 개인 택배조차 연약한 여자 선배들은 내게 손을 벌리기 일쑤였다. 실질적 업무는 각 팀 간 방어본능이 있어 침범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이런 육체적 ‘도움’은 수수방관하기 마련이다. 남자가 절대 소수인 가운데 내 업무가 아무리 바빠도 막내가 이 상황을 벗어나기란 그리 쉽지 않은 법. 내게는 막내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과 ‘하지 않으면 싸가지 없는 일’에 더불어 ‘남자니까 해야 하는 일’도 덤으로 얹힌 셈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여자 선배들 사이에서 정작 힘들었던것은 심리적인 부분이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내게는 동성끼리 공감할 수 있는 유대감이 절실했건만 이를 해결할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속이 쓰릴 때마다 홀로 회사 건물 밖에서 담배만 물어댈 뿐. 그리고 이런 나의 고단한 막내 생활의 중심에는 항상 M선배가 있었다.(지지리도 복 없는 팔자는 사회에서까지 이어져 마음 아프게도 내 직속 선배였다.) 비록 뒷담화가 여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M선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뒷담화의 향연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순식간에 돌변하는 감정 컨트롤과 언행이 교묘하게 비껴가는 능력은 보너스였다. M선배의 화려한 뒷담화 스킬이 한때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귀에 들어오는 온갖 험담의 종류가 화려해질수록 내 얼굴은 눈이 부셨는지 심하게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를 바라보며 던진 M선배의 한마디는 지금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하다.
"듣기 싫어도 들어요."
내가 딱히 이성에게 판타지를 가지고 있거나 하지는 않다. 수년간 여동생과 함께 살면서(가족 모두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단 둘이서 사는 것 말이다) 겪은 여러 사건 사고 덕분에 꽤 현실적인 이성관을 가지고 있다고 자평한다. 그럼에도 ‘생소한 공간’에서 만나게 될 ‘처음 보는 이성’에 대한 기대는 항상 있기 마련이다. 처음 입사할 때 남자들은 대부분 본인보다 어리거나 적어도 동갑내기인 여자 선배들을 만나지 않던가. CF에서처럼 커피믹스를 손에 쥐어주면 뒤돌아서 웃음 짓는 이나영이나 1초 만에 건네는 아이스크림에 감동하는 참한 여성은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만남, 아니 적어도 뭔가 친근한 인간관계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싶었다. 동생이 설거지 안한다고 징징대거나 술 먹고 늦게 들어와서 토악질하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흥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괴로운 일이 없다. 일 자체가 힘들어서 괴로우면 차라리 말을 하지 않겠다. 도무지 동기부여가 되지않고 의욕이 생기지 않으며 무의미한 일상이 반복됐다. 내가 원래 단체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나? 아니면 정말 특수한 상황에 놓인 것인가? 나름대로 튼실한 인간관계를 구축해왔다고 자부했던 가치관이 붕괴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내가 신경 쓰였는지 여자 선배 몇 명이 데리고 간 곳은 프랑스어 간판이 붙어 있는 고급 커피숍. 그곳에서 쉴 새 없이 오가는 선배들의 수다 가운데 홀로 끼어있던 유일한 남정네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한없이 겉도는 이야기들이(나에게 남자라는 소재는 무익하다) 무르익을 즈음에는 머리가 지끈거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M선배는 여전히 강요했다. "듣기 싫어도 들어요." 만약 내가 이곳에 적응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모르도록 방치한 그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나라는 존재를 무시하는 처사다. 선배란 존재는, 윗사람이라는 자리는 그래서 어려운 것 아니겠는가. 총체적인 책임의식이 방기된 채 말초적 감정에 의지해 움직인다면 밑에서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랫사람의 이해와 포용은 한계가 있다. 권한이 없으므로.
그런데 이런 고민은 의외로 무척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신규 사업기획팀이 새로 생기면서 그쪽으로 차출되어 가게 된 것이다. 다행히 새로 옮긴 팀에는 남자가 3명이나 있었고, 흡연자이자 술을 좋아했으며, 당구 수준이 나와 엇비슷했었다. 나의 얼굴에는 웃음이, 임에서는 농담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또 의외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신규 사업 기획팀 인재추천프로그램에 M선배가 참여했다는 것. 그리고 나를 추천했다는 것.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때 놀랍기 그지없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건대 지금까지 열심히 까댄 M선배도 내가 불편했으리라. 담배 한대, 소주 한잔으로 속내를 털어놓는데 익숙한 ‘내추럴 본’ 남자인 내가 여자들의 리그에 불청객이었을지도. 혼자인 나도 불편했지만 갑자기 끼어든 낯선 존재에 뭇 여자 선배들이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막 지나가는 M선배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때론 조금 멀리 떨어져야 원만한 관계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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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문득, 호진이형이(aka 1박2일 PD) 원고를 의뢰했다. 본인이 일했던 잡지사에서 기획기사를 진행 중인데 내 이야기도 듣고 싶다는 것. 그렇게 작성된 이야기이다. 물론 적당한 각색도 있었고 했지만 대부분이 사실. 때문에 기사는 익명으로 나가야만 했었고, 이 기획기사 속에서 난 잠시나마 정형원이라는 대기업 사원이었다. 참, 마지막 문단은 내 이미지를 위한 방어였달까. (익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닝겐이란 참…ㅋ) 사실 지금도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매우매우 X ∞) 좋지 않다.
뭐 여튼, 이번에 이사하면서 지난 과거들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 벌써 6년전 일이 되어버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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